불교를 생활화   2008.03.01 조회:2850
金 東 里
-남의 부탁 받고 한 번도 미루는 법 없어-


백상 장기영 선생을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1949년 겨울이다. 당시 나는 《민국일보》라는 새로 된 신문의 편집국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하루는 당당한 체구에 정중한 얼굴의 젊은 신사 한 사람이 나타났다. 한국은행에서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명함을 교환하고 응접실로 가 옮겨 앉았는데 그분이 바로 장기영 씨였다. 당시 한국은행의 조사부장이던가 차장이던가 하는 직위였다. 용건은 기사 부탁이었다. 그 당시 그정도 기사 부탁건이면, 평직원을 보내든지 관계서류를 우송하든지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저희 쪽에서 부탁을 드리는데, 그렇게 하면 결례가 되지 않겠어요. 당연히 찾아와 뵈야죠”했다.
커피를 내어 왔더니 맛있게 마시고 일어났다. 인상이 좋았다. 나는 그 기사를 정경부로 넘기면서 정중히 다루라는 일러 주었다. 공무상의 일이긴 했지만 그가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은 이때 한 번뿐이었다. 그뒤 나는 줄곧 나에게 신세지는 쪽이 되었다.
그해 연말께던가, 이듬해 정초던가 분명치 않다. 한은에서 각 신문사 주필, 편집국장을 초대하여 저녁을 같이했다. 어떤 요정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은측에서도 5~6명이 나왔었다. 주객이 어우려져 술을 마셨다. 그런데 왠지 장 선생은 나한테 유독 더 친절한 편이었다. 두 차례나 내 곁에 와서 술을 권했을 때,
“저, 김 선생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본디 문학을 좋아했거든요”
했다. 그날 밤 나는 술이 취해서, 머플러를 바꾸어 걸치고 나왔을 정도였다.
1951년 1 ·,4후퇴 때였다. 나도 부산엘 갔다. 내 친구 P형이 나에게 예금통장이던가, 무슨 수표던가를 주면서 여기 든 돈 좀 찾아낼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액수가 200만 원이던가 되었다. P형의 연고자는 대구에 많고 그 대신 부산에는 나의 연고자가 많지 않겠느냐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P형의 통장인가 수표인가를 가지고 한은으로 찾아가 장 선생을 만났다. 그 당시 일반 시중은행에서는 그런 따위 결제가 통하지 않을 때였다. 장 선생은 그것을 받아 들고 한참 생각하더니,
“보증수표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호의인지를 잘 모르는 채 P형을 위해 그의 신세를 졌던 것이다.
환도 후 장 선생은 은행에서 나와 조선일보를 운영하다가 나중 따로 나와 《한국일보》를 창간했다. 《한국일보》는 제1면(정치면)에 아침마다 시를 한 편씩 실었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젠가 그가 “나도 본디 문학을 좋아했거든요”하던 말이 머리에 떠오르곤 했다.
1965년이던가 그 당시 나는 지금의 ‘문협’ 부이사장으로 있었다. 문협 주최의 지방문학 강연을 계획하고 한국일보로 찾아가 장 사장을 만났다. 한국일보에서 후원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는 나를 인도하여 간 문화부장을 잠간 건너다보고 나서 이내, “해 드려야죠”하고 나서, 문화부장에게 따로, 잘 해드리라고 지시를 했다.
그 후로 ‘문협’ 주최 지방 문학 강연회는 전국 5개 도시 내지 7개 도시로 여러 해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안다.
그뒤 내가 문협 이사장직을 맡았을 때였다. 이번에는 문인축구대회를 열자는 요청이 ‘문협’에서 일어났다. 그때고 지금이고 ‘문협’이란 데는 예산이 없다. 조그마한 행사라도 벌이려면 누가 경비 뒷받침을 해주어야 했다. 나는 또 한국일보를 찾아갔다. 당시의 문화부장은 이영희 씨였다고 기억한다.
이영희 씨의 인도로 나는 장 사장을 만났다.
“문협에서 축구대회를 열겠답니다.” 이영희 씨가 웃으며 용건을 터뜨렸다.
장 사장은, 그래서 무어지요,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예산이 전혀 없습니다.”
“얼마 들죠?” 내가 액수를 말했다. 10만 원이던가 7만 원이던가 그랬던 것 같다. 지금 돈으로 약 30 ~40만원 상당 액수가 아닐까 한다.
“얼마 안되는군요. 해 드리죠.” 장 사장은 즉석에서 응낙했다.
이 밖에도 이런 따위가 한두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찬찬히 기억을 더듬을 시간도, 지면도 없다.
요컨대 백상 선생이 살아 계시는 동안 나는 내 개인의 일은 아니지만, 줄곧 신세를 졌다. 일방적으로 특정인의 도움만 받았다는 것도 가볍게 생각 할 일이 아니지만 내가 특히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해주었다는 결론보다도 그가 응낙하던 태도에 있다. 그는 한 번도 생각해 보겠다든가 의논해 보겠다든가 하여 하루고 한 시간 이고를 뒤로 미루는 일이 없었다. 언젠가 즉석에서 ‘해 드려야죠’가 아니면 ‘해 드리죠’였다. 그뒤 나는 백상 선생이 나에게뿐 아니라 그가 접촉한 모든 사람에게 대개는 이와 비슷했다는 것을 들었다. 누구에게도 유감을 쌓게 하거나 원한 살 만한 일이 없었다고 들었다.
백상 선생이 작고하여 문상을 갔을 때, 그 여러 가지 의식 상황으로 보아 선생이 평소 불교신자였다는 것을 비소로 알았다. 이를 통하여 나는 백상 선생이 불교정신을 생활화하고 실천하던 분이란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길이 명복을 누리시길 빈다.

略歷 1913년생. △경신중 4년 중퇴(29년) △중앙대 문학박사 학위 받음(73년) △청년문학가협회장(47년) △문학가협회 소설분과위원장(49년), 부위원장(51년) 예술원 회원(54년) △서라벌예대 교수(55년) △문협 이사장(70년) △중앙대 예술대학장 겸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 · 한일서예 문화교류협회장(72년) 소설가협회 대표위원 △예술원 회장 ·평화통일정 책자문위원(81년) ·민족문화추진회 이사 ·불교아동문학회 회장 ·독립 기념관건립추진위 이사